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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네 살 단어 사전_쉼 (지은이: 썸머 / 장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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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면 뭘 할 계획이에요?”
20년간 일한 직장에서 1년의 무급휴직을 선택하니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나는 답할 말이 없어 그저 하하 웃는다. 운동을 해서 몸을 건강히 만들어야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니 글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 어떻게 잘 쉬는지를 블로그로 소통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당연히 해외 한 달 살기를 해야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답들을 말한다.
“저의 계획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하고 정색하고 말하려다, “그것도 좋겠네요.”하며 그냥 하하 웃는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하려 집을 나서던 2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가슴의 두근거림과 손끝의 떨림으로 도저히 출근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상담받고, 약을 먹으며 6개월을 버텼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진 않았다. 아무래도 쉬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제대로 된 휴직을 준비하기 위해 1년을 버텼다. 청소년기의 아이 둘과 경제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일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마음으로 1년의 휴직을 시작했다.
휴직을 시작하고 3주간은 집 안의 대청소로 바빴다. 직장을 핑계로 돌보지 않던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20리터 쓰레기봉투를 20개도 넘게 채워 버린 것 같다. 마음이 조금 개운해지기도 했지만, 그동안 집안일에 손을 놓은 과거의 나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3월 말 즈음 서유럽 패키지를 엄마와 떠났다. 몸도 마음도 아직 건강하지 않을 때였다. 이탈리아의 바닷가 마을과 스위스의 눈 덮인 산은 좋았지만, 긴 비행과 버스의 긴 이동으로 몸이 퉁퉁 부었다. 또 여행 중 엄마와의 아주 작은 사건을 시작으로 나는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했던 마음들이 올라왔다. 그렇게 퉁퉁 부은 마음으로 엄마와의 여행이 계속되었다. 그런 여행이 힐링이 될 순 없었다.
여행을 돌아와서 운동과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무리했는지 난생처음 대상포진에 걸렸다. 며칠 동안을 다리가 저리고 아파 걸을 수조차 없었다. 여러 방해하는 상황들 때문에 직장에 출근을 못 하게 되거나, 실수해서 업무를 망치는 악몽을 매일 밤 꾸었다.
안돼! 이러다가는 나의 쉼이 정말 망쳐질 것 같아 불안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나는 내 자신에게 선언했다.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 소파에 누워 그날그날 보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온종일 게임도 하고, 밤늦게까지 쇼츠도 실컷 보았다. 아이들의 아침을 챙겨주지 못했고, 설거지는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먹을 그릇이 없을 때 했다. 가족들이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응원이 되었다. 조금씩 그렇게 몸이 회복되어 갔다.
가끔은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수시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계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힘들기도 했지만, 건강한 관계를 통한 나 자신의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꾸준히 참석했던 <청춘 다, 시> 프로그램은 나의 돌아봄에 대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임에서 나눈 영화와 책, 드라마, 차,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점점 악몽도 사라져 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영화 속 찬실이를 만나서 참 위안이 되었다. 뜻하지 않는 일들로 그녀 역시 나처럼 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상황을 통해 힘을 얻고 다시 손전등을 켜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은 나를 향한 응원이었다.
그즈음 나를 항상 응원해 주는 친구가 나에게 시 한 편을 소개해 주었다. 친구가 읽어줄 때도 좋았지만, 내가 찾아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참 좋았다. 사람들의 질문에, 어쩌면 나 스스로 나에게 했던 질문에 답을 드디어 찾았다. 쉬면서 무엇을 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나는 이제 이 시로 답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같이 ‘쉼’을 선택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 시로 응원을 보낸다.
정지의 힘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리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_백무산시인, <정지의 힘>
마흔네 살 단어 사전_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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