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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사랑하라 (지은이: 해밀 / 장르: <내 이름은 김삼순 > 드라마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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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몰랐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많은 약속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맹세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덜 힘들 수 있을까?

허튼 말인 줄 알면서도 속고 싶어지는 내가 싫다.

의미 없는 몸짓에 아직도 설레이는 내가 싫다.

사랑을 잃는다는 건, 어쩌면 자신감을 잃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_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2005년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모태 솔로’였다. 내년이면 졸업반이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던 시기이기도 했다.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어떤 걸 해야 재미를 느끼는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심하던 여름 길목에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만났다. 까칠하지만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나오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빠지지는 않았다. 마음 떠난 남자 앞에서 날 사랑하긴 했냐며 눈물 콧물 흘리는 삼순이가 찌질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가슴 아파하며 몸부림쳐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당시 나는 사람이 아닌 드라마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사람을 좋아하는 일 따위는 우선순위에 두지 않겠다 철벽 치던 애송이였다.

대학교 졸업 후 바로 서울로 향했다. 나의 꿈 방송 작가 교육원이 있는 그곳 여의도로. 드라마 작가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동기들과 글을 쓰고 합평하는 일은 재밌고 신나면서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새벽 감성 충만한 글을 기세등등하게 써갔다가 선생님께 된통 깨진 날도 있고, 너무나도 잘 쓴 동기의 대본을 보며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르의 슬픔을 느낀 날도 있었다. 그 동기는 훗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OTT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대본을 쓰게 된다. 부러운 녀석. 남들보다 대본을 잘 써야 다음 반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토너먼트의 잔인한 세계. 하지만 냉정한 실전에 비하면 한없이 관대하고 열정 넘치는 순수의 세계. 선배 작가들은 말했다. 교육원 시절이 가장 행복한 거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불같은 연애가 끝났을 때도, 실직을 당했을 때도 새벽같이 일어나 케이크를 굽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파티쉐를 꿈꿨다는 김삼순처럼 나에게는 드라마가 그랬다. 남부럽지 않게 살던 집이 아빠의 사업 실패로 날아가 버리고, 빨간 차압 딱지만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고독을 배웠다. 돈이 없어 봉지 쌀을 겨우 사다 먹고, 옷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서 커버린 몸을 옷에 겨우 욱여넣곤 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찮았다. 내가 본 책과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이런 시련쯤은 거뜬히 이겨내고 끝내 성공하고야 마니까. 돌이켜보면 사춘기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방어해 내는 수단으로 드라마 속 환상을 선택했던 것 같다. 어쨌든 드라마 덕분에 내 삶은 그리 최악은 아니었다. 외로울수록 책을 읽었고 글을 썼으며 드라마 주인공들의 눈물과 웃음을 보며 위로받았다. 망해버린 집안 형편에 가진 것 없는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드라마 작가뿐이라 여겼고, 마침내 방송가에 발을 들였다.

교육원 시절이 가장 행복한 거라던 선배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보조 작가로 시작한 드라마 작업은 너무나도 신나고 재밌었다. 내가 쓴 대사들을 화면 속 배우들의 입으로 들을 때면 전지전능한 신이 된 듯한 희열감을 느꼈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배우들을 직접 만나고 미팅하는 과정도 꽤 신선했다. 처음에는 연예인이다! 하면서 사인도 받곤 했는데 나중에는 체면치레하느라 그저 점잖게 앉아만 있었다. 작업을 거듭할수록 그들 또한 동료였기에 마냥 시청자 모드일 수는 없으니까. 반대의 날들도 다수였다. 남들은 꽃구경 다니는 봄날 노트북 앞에 앉아 미간에 주름 잔뜩 지어두고 한숨 푹푹 쉴 때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사나 싶기도 했다. 드라마 한 편당 수백억이 드는지라 온갖 참견과 간섭에 시달리곤 하는데 그 과정에서 편성마저 미끄러지면 몇 년씩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어디에서든 방영되지 않는 드라마는 영상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하더라도 죽은 몸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 또한 죽었다. 내가 쓴 글은 쓸모없어졌고 그에 따라 나도 같이 쓸모없어졌다. 수년간 홀로 드라마를 짝사랑 해오며 잠 못 자고 사람 못 만나고 글만 썼다고 항변해 봤자 결과물이 없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한 셈이었다. 모든 게 내 글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지 체념하면서도 미련은 버려지지 않았다. 사랑을 잃은 나는 캄캄한 우주에 홀로 버려진 먼지 알갱이처럼 고독해졌다. 쓸모없어도 사랑받고 싶어 울었다.

“그런 적이 있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였던 시절.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아득하고 목울대가 항상 울렁거렸다.

그 느낌이 좋았다.

거기까지 사랑이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내게 그런 행복을 주고 또 앗아갔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 그를 잃어서가 아니다.

사랑... 그렇게 뜨겁던 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믿어지지 않아서 운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 운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랑이 가여워서 운다.”

_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그즈음 첫사랑을 만났다. 이번 생애 드라마만 보고 살겠다고 얼음처럼 꽁꽁 얼어있던 나를 녹여준 사람. 그는 농담을 잘했다. 우울하다는 말에 겉면이 초콜릿 시럽으로 덮인 동그란 케이크 위에 포크로 스마일 그림을 그려주며 웃어 보이던 사람. 아무 날도 아니지만 작가 일 하시니까 그냥 사주고 싶었다며 헤밍웨이가 썼다는 브랜드의 수첩을 불쑥 내밀던 사람. 경직된 삶을 살던 내 눈에는 실없는 장난과 농담을 건네는 그가 새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허허실실 웃어넘기는 얼굴 뒤로 가정사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그 새털은 내 가슴에 와 내려앉았다. 꿈을 접은 뒤에도 주어진 삶을 즐기며 충실하게 사는 모습이 건실해 보였다. 날 보며 설레게 웃는 그의 눈빛에 내 마음도 살랑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돌직구 고백을 날리며 웃어주는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예뻐 보였다. 그를 떠올리면 목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짝사랑하던 드라마에 힘차게 걷어차여 본 적 있음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은 이번은 다를 거라 여기며 겁도 없이 퐁당 빠져버렸다. 첫사랑이 진행 중이던 그 시절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변치 않는 천년의 사랑이요, 절절한 멜로영화의 주인공이던 그와 나는 여느 커플들처럼 별거 아닌 일에 웃고 별거 아닌 일에 다투다 헤어졌다. 세상이 무너진 듯 넋 놓고 있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드라마 일을 시작했다. 수백 수천억이 오가는 프로의 세계에서 여전히 모자란 실력으로 빌빌대며 명줄을 이어갔다. 감히 가 닿을 수 없어 보일 만큼 독한 끈기와 뛰어난 재능으로 치고 나가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늘 제자리걸음인 나를 자책하면서. 제 이름을 건 작품을 세상에 내걸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았다. 무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있어 드라마란 더 이상 극한의 희열감을 주는 환상세계가 아니었다. 치열한 경쟁 속 살아남아야만 하는 전쟁 같은 현실 세계였다.

환상 속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로 회귀해서 좋은 점도 있었다. 항상 공중에 붕 떠 있는 글을 쓰던 나는 삶에 조금 더 발붙인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명대사에 크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바람피우다 걸린 현우가 삼순이에게 ‘내 사랑이 여기까진데 왜 여기까지냐고 보채면 어떻게 하냐?’라는 개소리를 할 때 함께 분노했고, 또 그 말에 수긍하기도 했다. 사랑은 변하기도 하고 그 유효기간이 서로 다르기도 하니까.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_<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도 디 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