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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끈 러브 (지은이: 해밀 / 장르: 소설 <소나기>와 <축복>을 읽고 살면서 스스로 ‘조연’같다 느꼈던 경험 소설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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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목에는 언제나 검은색 머리끈이 감겨있었다. 예전 여자친구가 머리를 묶고 싶어 할 때마다 건네주기 위해서 가지고 다닌 게 습관이 됐다고 했다. 그 습관은 배우가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단 한 번도 손목에서 빼놓지 않은 그의 사랑. 그가 손목에서 머리끈을 빼는 유일한 순간은 무대에 설 때뿐이었다.
그와 나는 강남의 한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카페의 시그니처 커피인 예가체프를 시켜놓고 제작 진행 중인 드라마 대본을 함께 읽었다. 알맞게 로스팅된 원두로 내린 예가체프는 맑은 브라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늘 커피를 마시기 전에 잔을 들어 향을 먼저 맡는 습관이 있었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로 스페인 비스트로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와인과 커피를 공부하면서 생긴 습관이라고 했다. 나도 그를 따라 예가체프의 향을 맡아본다. 코를 자극하는 산미가 지나가면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지나친다. 그 향기가 지나치기 전에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시큼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혀끝을 맴돌았다. 입술을 자꾸만 핥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노트북을 덮고 한강으로 나가 달빛을 안주 삼아 캔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술이 꽤 센 그와는 달리 나는 알코올 분해를 하지 못하는 나약한 간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항상 맥주는 나 1캔, 그 사람 2캔이었다. 더 마시라고 몇 번 권해보기도 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소주 1병을 다 비울 때가 있다. 안주로 신당동 우정분식의 닭발이 선정되었을 때. 신당동은 떡볶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매운 국물 닭발 찐 마니아들은 우정분식의 닭발을 최고로 친다고 했다. 맵고 징그럽게 생기고 뼈 발라 먹기 힘든 불호 3종 세트인 닭발. 보통 남자들이 싫어하는 요소를 다 가진 닭발을 그는 특히나 좋아했다. 그래서 함께 맛집 찾아다니는 여자 친구들처럼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매콤한 닭발을 위생 장갑 낀 손으로 야무지게 발라먹는 그와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찐친 모드였다.
여느 때처럼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회의가 늦어지는 바람에 30분 정도 지각을 했다. 그는 먼저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카페로 다가서는데 창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비가 내려 빗방울이 맺혀있는 카페 창문에 새겨진 그의 얼굴은 참 아름다웠다. 조각처럼 우뚝 서 있는 콧날과 깊은 눈망울은 현실감을 도무지 느낄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그 카페는 영화 관계자들이 자주 오는 곳이라 알바생 대부분이 연예인 지망생들일 정도로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인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그를 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연예인으로서뿐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도 아름다운 외모는 축복이라 생각했다. 평소 외모 가꾸기에 별 관심이 없는 타입이지만 드라마 작업을 하며 미팅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내 외모와 그들의 외모를 비교하게 된다. 일단 머리 크기부터가 다르다. 주먹만 한 얼굴에 큼직한 이목구비, 길쭉하고 마른 몸.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유전자 자체가 다르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나와 다른 외계인이거나 내가 그들과 다른 별에 사는 외계인이거나. 특히나 상대방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보는 그들의 눈동자는 깊이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며 역시 나와는 다른 별에 사는 생명체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봄날의 벚꽃처럼 해사한 그가 웃어주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네잎클로버를 찾던 주인공이 오늘 올 거야.”
네잎클로버를 찾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회사 대표님이자 진행 중인 드라마 프로젝트의 메인 작가님이 쓴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존경하는 이를 위해 생일 선물과 함께 전달할 네잎클로버를 찾으러 온 산을 뒤지고 다녔다는 대책 없이 순수한 남자. 작가님은 그러한 진심과 열정이 독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경계해야 한다고도 했다. 보상받지 못하는 호의는 때론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아름다운 장미와도 같으니까. 작가님 댁 홈파티에서 처음 본 그의 첫인상은 아이돌 그룹 멤버 같았다. 분명 나보다 한두 살 위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상당히 동안인 얼굴. 뽀얀 피부에 큰 눈망울, 오뚝한 코에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그를 어려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모델 출신의 영화배우이자 가끔 연극 무대에도 선다는 그의 두 뺨과 양손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잘생긴 피조물 앞에 굳어있는 나에게 그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눈웃음에 내 손은 저절로 움직였다. 얼떨결에 잡은 그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몹시 차가웠다.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손대면 움찔할 정도로 시리고 차가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파란색 장미꽃 같은 사람. 추운 겨울 흰 눈 내리던 날 밤 그렇게 그와 만났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좋아하는 영화와 작가가 같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꽤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데리고 펍에 가서 다트 게임도 하고, 이사하던 날에도 옆에 남자가 있어 줘야 한다면서 같이 짐을 날랐다. 그를 흘깃대는 사람들 시선이 껄끄러운 나와는 달리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매니저나 코디 일 도와주는 성실한 연예인 정도로 보였겠지. 이사를 무사히 마치고 작업 중인 드라마 속 배경이 될 칵테일 바에 취재 핑계 삼아 들렀다. 그와의 술안주는 대부분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당시 나는 떠나가 버린 첫사랑에 대한 상처로 마음을 열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왜 떠났을까. 나는 왜 붙잡지 못했을까. 붙잡아도 소용없을 걸 아니까 잡지 않은 거라는 둥 술만 마시면 온갖 찌질한 멘트를 쏟아내고 있었다. 끝내 눈물이 글썽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는 술이 있다면 마시겠느냐고. 그는 오묘하게 빛나는 연둣빛의 압생트가 든 잔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녹색의 악마’라 불리는, 한때 독성 논란으로 금지되기도 했던 술. 나는 대답 대신 딸꾹질을 했다. 딸꾹딸꾹. 밤새 딸꾹질을 하는 나를 그는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날은 그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 원래도 조각처럼 생긴 사람이었는데 무대 분장을 하니 코가 더 오뚝해진 탓에 인형처럼 보여 웃음이 났다. 극이 시작되기 전 그는 나를 무대 뒤로 불렀다. 머리를 그렇게 귀신처럼 풀고 있으면 연기하다 깜짝 놀랄 수 있으니 묶고 있으라며 손목에 있던 끈을 풀어내 머리에 묶어주었다. 그에게 그 머리끈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가 손목에서 머리끈을 빼는 유일한 순간은 무대에 설 때뿐이었다. 무대에 설 때 끼고 나갈 수 없어 잠시 부탁한 것뿐이라고 마음을 애써 잡아 보았지만, 두근대는 심장을 어쩔 수 없었다. 연극이 끝날 때쯤 진동이 울렸다. 익숙한 번호의 그 사람.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는 첫사랑의 전화를 받기 위해 나는 극장을 나섰다.
그날 이후 그를 잘 볼 수 없었다. 새 작품에 들어가게 되어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다고 했다. 배우들이란 뭐든 많이 배우고 다녀서 ‘배우’라 부른다고 농담하던 그의 말을 실감했다. 사극을 하려면 말도 탈 줄 알아야 하고 활도 쏠 줄 알아야 한다나. 나한테 머리끈을 주던 순간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가 건네준 검은색 머리끈은 사랑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그에게 머리끈을 돌려주지 못한 채 수일이 지나갔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잊혀도 괜찮은 존재로만 남았다. 그사이 나는 첫사랑과 재회했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대는 모델 출신으로 늘씬한 키에 도회적인 이미지를 지닌 연기자라고 했다. 키 작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나와는 정반대인 사람.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결국 우연이었던 건가.
자주 만나던 카페에서 다시 만난 그는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매번 주문하던 예가체프 대신 쌉싸름하고 향긋한 얼그레이 홍차를 주문했다.
“결혼한다면서?” “네.” “첫사랑이라던 그 사람?” “네. 오빠도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면서요?” “고백했다 차였어.” “아...” “늘 타이밍이 늦길래 이번엔 좀 일찍 했더니 그렇게 됐네.”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이며 차를 마시는 그의 눈빛에 쓸쓸함이 담겼다. 잔 속에서 노을빛을 닮은 홍차가 잔물결을 그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와 나의 썸은 여기까지였다. 마지막으로 함께 마셨던 얼그레이의 쌉싸름하고 향긋한 맛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망해버린 썸이지만 달콤 쌉싸름한 한 잔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청춘의 썸은 망해도 손해가 아닌 덕분이다. 그 후로도 종종 티브이에 출연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화면 속 배우는 나와 함께 맥주캔을 부딪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화려한 자신의 별로 돌아갔을 테니. 나는 지구에 남아 밤하늘을 올려다볼 뿐이다. 한때 나의 다정하고 찬란했던 별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