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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소복 (지은이: 해밀 / 장르: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를 보고 청춘 다, 시 멤버들과 나눈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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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춘들의 행복한 시간.

이 글은 청춘 다, 시의 첫 시작이자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청춘의 시(詩) 같은 순간들을 모아 다시 국물을 진하게 우려내는 시간. 깊은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되지만, 꼭 필요한 과정. 어떤 맛과 향을 지닌 음식을 만들어 낼지 각자의 선택은 다르겠지만 지난 3개월 동안 나와 그들이 우려낸 청춘 다, 시는 예술을 통한 충족감과 여유로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두근거림이 주를 이룰 것이다.

청춘 다, 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동네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계정의 인스타 피드에서였다. 모임명이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청춘의 모든 순간이 다 시(詩)라니! 게다가 뜻도 멋있었다. 잊었던 시간 속 머물러 있는 나의 청춘을 반추해 보며 새로운 시작을 도모해 볼 수 있는 모임. 다시 이름, 다시 고백, 다시 유랑, 다시 시작으로 나누어진 테마에서 바쁜 일상 속 힐링 타임을 선사하겠다는 기획자의 다짐이 느껴졌다. 소설과 시, 드라마와 영화, 동요들을 살펴보며 함께 생각해 보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얼마 만이던가. 결혼하고 육아를 도맡게 되어 경력이 끊긴 후로 어른의 언어와 생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이 참 귀해진 나로서는 너무나 가슴 벅찬 시간이기도 했다.

돌부리에 걸려 인생이 고꾸라지더라도 나를 믿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다시 일어설 힘이 난다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 영화는 예술영화 프로듀서였다가 실직하게 되면서 마흔두 살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김초희 감독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 작가 일을 하면서 PD들을 제법 만나보았기에 극 중 찬실이의 심정에 이입하며 보았다. 그와 동시에 제작사 사정상 몇 번이나 바뀌는 PD 때문에 대본이 엎어지는 동료 작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작가든 PD든 감독이든 모두가 돈 앞에서는 버틸 장사가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더욱 외롭고 쓸쓸한 이 길에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는 찬실이는 어떤 복을 많이 받았던 것일까.

근심을 피하며 살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고 다니는 산만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소피,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키우며 불어 과외 일을 하는 김영, 귀신인지 환상인지 모를 의문의 남자 장국영, 딸을 먼저 앞세우고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는 가슴 절절한 문구를 써내는 시인이 되어버린 하숙집 할머니. 이 모두가 찬실이가 살아갈 이유를 찾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짝사랑하는 김영과 산책하다 할머니들이 사진 찍으며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본 찬실이는 말한다.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거 같아요. 안 그러고선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라고. 도무지 웃을 일 없는 억장 무너지는 일의 연속인 삶 속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간직하는 것은 대단한 내공이 필요한 일임을 찬실이는 꿰뚫어 보았다. 예술 감독 밑에 있을 때 친절하게 대해주던 제작사 사장이 지금은 끈 떨어진 연 취급을 하더라도. 가슴 속 움트던 사랑의 불씨가 홀라당 다 타버려서 쪽팔림으로 남았을지라도. 찬실이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삶의 밑바닥을 치고 나서야 사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머리로만 아는 거 말고 노트북 빈 화면에 채워 넣는 반듯한 글자 말고. 삶의 머리채를 잡고 쥐어뜯으며 끝장을 보고야 알 수 있는 찐 인생. 삶의 진액을 담아내는 진짜 영화를 만들어 보고파진 찬실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달빛조차 희미한 캄캄한 밤 찬실이가 비추는 한줄기 손전등 불빛에 의지한 채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유명 예술 감독의 후광도 제작사의 후원도 없이 우뚝 서리라 결심하는 찬실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환한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엔딩을 보며 장국영이 극장에 홀로 서서 기립박수 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절친 소피마저도 지루해서 도저히 못 읽겠다던 그 시나리오였을지 아니면 망한 인생을 겪어본 찬실이가 각성하여 재밌는 영화를 만들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을 오롯이 제힘으로 부딪쳐 온 찬실이의 이야기가 그에 담겨 있을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극장에 장국영 혼자 있었던 걸 보면 뛰어난 작품성과 별개로 흥행에는 실패했을 거 같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찬실이의 홀로서기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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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다, 시 멤버들과 함께 사는 게 뭔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았다. 사는 것 안에는 꿈도 있고 사랑도 있고 출산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여유와 내공도 있고 박사 논문도 있었다. 모두 우리가 안다고 여겼던 말들이지만 제대로 알아보고 정복하고 싶은 욕심 나는 단어들이었다. 우리는 모임 시간마다 서로가 내민 글에 어떠한 판단도 비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이 가지 않으면 가지 않는 대로, 눈물 나면 나는 대로 각기 다른 얼굴과 생각들로 시간을 채워갔다. 누구의 청춘은 썼고 다른 어떤 이의 청춘은 달았고 또 다른 이의 청춘은 담백했다. 모두 다 달라서 재미있고 신선하고 맛있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생각을 나눈다는 것은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 것처럼 경이롭고 가슴 벅찬 일이니까.

우리 안에 깃든 복을 서로에게 나누어주는 뜻깊은 시간도 가져보았다. 카드에 행운의 문구를 적고 그 위에 스크래치 스티커를 붙이면 완성되는 귀여운 복권 키트였다. 복권 카드에 어떤 내용을 적을까 고민에 빠졌다. 누가 뽑든 받으면 기분 좋고 든든한 마음이 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고민 끝에 결정했다. 몸이 좋지 않은 분들에게 건강한 운을 빌어주는 문구를 쓰기로. 일명 ‘뒷목 잡을 일이 생겨도 무병장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불로장생 카드’. 다른 이에게 갈 행운을 빌어주고 나니 내 마음도 포근해졌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각자의 복권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동안 멤버들의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머물렀다.

드디어 복권을 나눠 가지는 시간. 내가 뽑은 카드는 ‘소복소복’이었다. 작고 소소한 복들이 소복소복 쌓여 큰 행복이 될 수 있기를, 일상의 행복을 느끼자는 뜻인 것만 같아서 참 소중하게 다가왔다. 인생 역전을 바라게 되는 로또 1등이나 사업이 대박 나라는 말보다 더 현실성 있는 문구라서 좋았다. 마음에 쏙 드는 카드를 뽑고 나니 조금 떨렸다. 내 복권은 누가 뽑았을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잠시 후 내 복권을 뽑은 멤버가 카드 문구를 읽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사람에게 갔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리된 거 같아 만족스러웠다.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랑이 찾아가고, 휴식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휴식이 적힌 카드가 찾아갔다. 그 문구가 필요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운 카드가 제 발로 찾아간 듯 잘 분배되어 뿌듯하고 신기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