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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의 꿈 (지은이: 김리라 / 장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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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불면증에 뒤척이는 밤이면, 축축한 침대에서 고문받기보다는 밖으로 뛰쳐나가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나는 태생이 방향감각 없는 길치라 집에서 나오자마자 똑바로 난 길을 따라 난 강변을 걸어 다녔다. 습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강둑을 걸어 내려가다 보면 강을 타고 난 길을 마주하게 된다. 어둠 속에서 강변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걷다가 진이 쏙 빠질 때쯤 그대로 뒤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물론 길치에겐 아무리 해도 익숙하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이렇게 걷다 보면 눈에 띄는 붉은 페인트가 발린 기둥을 만나게 된다. 이 기둥에서 서른 걸음 뒤에, 집으로 이어지는 강둑이 나타나는 것이다. 둑을 올라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 제대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을 설치다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에 이어지는 온갖 잡념과 섞인 뜨끈한 공기 덕분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달째였다. 병원을 돌고 돌아 처방받은 약을 한 움큼 삼키고도 잠들지 못했다. 그런 멍한 정신으로 가져온 핸드폰은 배터리도 얼마 없어 도착하기도 전에 맥없이 꺼져버렸다. 이대로 뒤돌아 집에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방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꺼림직했지만 항상 가던 길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문제는 얼핏 눈에 익은 강둑을 내려온 다음 강변을 따라 난 길에서 문뜩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길치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왼쪽이었던가?'
고개를 돌려 어두운 길을 바라봤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이리로 가면 된다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하나는 골라야 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을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똑같은 검은 길이 뱀처럼 이어질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면 그냥 찍는 수밖에. 조금이라도 익숙해 보이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터덜터덜 강바람을 맞으며 발을 옮겼다. 약에 취한 걸음이 느려져 발자국이 땅 위를 쓸었다. 비틀거리다 걷다 하며 제발 얼른 기운이 빠져 잠들 수 있기를 빌었다. 그렇게 멍해진 눈으로 걷던 중이었다.
'여긴 어디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처음 보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더 이상 강변도 아니었다. 발목까지 오는 수풀이 우거진 곳. 나는 언제 이곳에 도착했는지 어리둥절했다.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 살펴보아도 한두 뼘 정도 시야에 닿는 곳은 모두 풀숲뿐이었다. 귀를 기울여도 바람이 풀숲을 스치는 소리 뿐. 생경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약기운이 훅하고 가셨다.
"..여기 누구 없어요?"
입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는 작고 갈라져 있었다. 낯선 장소에선 언제나처럼 압도되어 도저히 크게 소리 낼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애꿎은 핸드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눌러보았다. 하지만 방전된 베터리가 켜질 리가... 나는 일단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돌아온 길로 되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미 풀숲엔 길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까지 아찔해진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이젠 걸음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손을 뻗어 어둠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제대로?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길을 알아야 제대로 가는 거지. 길도 방향도 모르는 나는 일생을 제대로 가본 적 없다. 그저 헤매다 우연히 도착할 뿐. 그런 생각에 정신이 팔렸다가 손끝에 툭 하고 닿은 무언가에 자지러질 뻔했다. 가까스로 비명을 삼키고 다시 손을 휘둘렀다. 여전히 몇 발자국 앞, 수풀만 보일 뿐 너머의 어둠 속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바람도 멈춰서 풀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놀라 자지러질 것 같은 숨소리. 나는 또다시 어둠 속으로 뻗어보았다. 어둠을 휘적여 보았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주춤주춤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사방은 다 어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다가 겨우 용기 낸 한 발자국에 또 코를 박고 쓰러졌다. 이젠 확실했다. 어둠 속에 무언가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수풀을 밟는 소리만이 났다. 목 안이 찢어진 듯 피 냄새가 났다. 긴장으로 침이 말라 타들어 갔지만 비명이 삐져나올까 무서워 입을 꾹 닫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약기운에 꿈이라도 꾸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넘어지며 짚은 풀숲 사이로 뜨끈하고 끈적한 무언가를 짚은 느낌은 생생했다. 비릿하고 익숙한 냄새도 났다. 드디어 참지 못하고 비명이 삐져나왔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도 수풀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영원히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