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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섬에서 태어난 모녀는 (지은이: 김미양 / 장르: 초단편소설(논픽션90%, 픽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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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I Have a Dream”
4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들로 거리는 혼잡했다. 미아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 통화 연결음으로 ABBA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미아는 그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모습을 가게 유리창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후배에게 빌린 정장이 어색했다. 선머슴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화장기 없는 맨얼굴. 셔링이 잔뜩 잡힌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꼴은 영락없이 엄마 옷을 몰래 꺼내 입은 아이 같았다.
“어, 엄마. 나 발표 잘했는데, 서울에 일주일 더 있다가 내려가야 할 것 같네? 결과가 다음 주에 나온대. 어쨌든 본상은 확정이고, 다음 주에 호텔에서 시상식 한다고 그래서…….”
호텔, 시상식, 그 두 단어를 발음하는 동안 쇼윈도에 비친 자기 모습에 다시 눈길이 갔다. 구부정한 허리를 세우고 아랫배에 힘을 꽉 주었다. 이미 칠 센티 하이힐을 신었지만, 더 높은 구두를 신은 양 까치발을 세워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귀에서 윙윙 울리는 와중에도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 기냐? 게믄 오빠 밥은 누가 챙겨 주지?”
예상 밖의 답이었다. 미아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위를 건널 때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말았다. 그녀의 양옆으로 무심한 표정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발이 아팠다. 미아는 가방을 뒤져 대일밴드를 꺼냈다. 뒤꿈치에 잡혔던 물집이 터져 살갗이 벗겨지고 있었다. 밴드를 붙이고 몸을 일으키다 유리창에 비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미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제주도로 돌아가 밥을 차려야 하는 주제에 호텔 시상식에 갈 꿈을 꾸었던 촌스러운 정장 차림의 여자애, 바로 자신이었다.
1977년, “Dancing Queen”
“검질 매러 갈 생각 안 행으네 어디레 감시? (※잡초 뽑으러 갈 생각 안 하고 어디로 가니?)”
돌담길을 내달리는 정금의 등 뒤로 엄마의 매선 외침이 내리꽂혔다. 그래도 두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금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거친 바람을 뚫고서 언덕배기에 올랐다. 이리저리 물결치는 푸른 보리밭 너머로 보리보다 더 파란 바다가 보였다. 정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바다를 노려보았다. 저 바다 너머엔 어떤 세상이 있을까? 정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쯤 희숙이랑 미순이는 양 갈래머리를 곱게 땋아 늘어뜨리고 단정한 세일러 교복 차림으로 옆 마을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겠지. 반들반들한 나무 책상 위에 교과서 펼쳐놓고 세계 지리나 영어를 배우고 있겠지. 정금은 자신의 흙 묻은 손이 부끄러웠다. 호미나 낫이 아니라 시집을 손에 쥐고 싶었다. 친구들처럼 팝송 한두 곡쯤은 가사를 외워 술술 적고 싶었다.
정금은 요즘 ‘아바’라는 가수의 노래에 푹 빠져 있었다. 읍내 미용실에서 일하는 언니가 테이프를 구해다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디, 에이,… 엔, 씨,…. 정금은 큰오빠가 쓰던 영한사전을 펼쳐 떠듬떠듬 뒤져가며 뜻을 찾았다. 댄싱, 퀸. 춤의 여왕이라는 뜻일까? 아바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오월의 보리밭마냥 파랗게 파랗게 일렁거렸다. 세븐틴, 낯선 그 말은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라는 말보다 더 매력적으로 들렸다. 언니가 쉬는 날, 엄마가 집을 잠시라도 비울라치면 정금은 밭일이나 부엌일은 제쳐두고 언니와 함께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었다. 언니는 파마약 없이 물을 뿌려 정금의 머리를 구불구불 말아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감물 들인 몸빼 바지도 댄싱 퀸의 화려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물이 마르면 파마도 풀리고, 정금은 원래의 역할로 돌아가야 했다. 열일곱 살 정금에겐 주어진 일이 많았다. 오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집안을 싹 닦아놓는다거나, 밭에서 검질을 매고 마늘대를 뽑는다거나 하는.
늘 하던 일과인데 오늘따라 왜 그리 서러웠는지는 모를 일이다.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서는데 머리 위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서였을까. 하얀 몸체의 비행기가 날개를 펴고 창공을 가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금의 두 눈에 별안간 투명한 물이 고였다. 그 순간 그녀는 소쿠리와 낫을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이나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정금은 아예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하얀 거품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유 캔 댄스, 유 캔 자이브’. 당신은 춤을 출 수 있어요. 그 뜻은 이제 알았는데 정금은 아직 궁금한 것이 많았다. 당신은 공부를 할 수 있어요. 그건 영어로 뭐라고 할까? 당신은 바다를 건널 수 있어요. 그건 또 뭐라고 할까? 다시 눈물이 핑 돌아 정금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울음소리를 바닷바람 속에 묻으며 생각했다. 나는 딸을 낳아도 공부를 시켜 줘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까지 꼭 보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