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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지은이: 김리라 / 장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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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처럼 끌려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뻑뻑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붉게 깜빡이는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는 서른여덟 살의 또다시 '취업 준비생'에게는 칼로 도려낸 상처와도 같았다. 이번이 딱 100번째 불합격 통보 메일이었다. 가슴 위를 누르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깊은 숨으로 뱉어보려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 덜컥 걸려 다시 가슴을 내리눌렀다. 끈적한 손을 들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실패, 좌절, 무력감 그러고도 포기가 되지 않는 목마름. 타는 듯한 갈증에 눈앞이 벌게졌다. 나는 벌컥 서랍을 열어 그 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의 재능은 말하자면 '장려상' 정도의 재능이었다. 어떨 땐 참가상일 때도, 입선일 때도 있었다. 어디 가서 자랑스레 말하기도, 그렇다고 재능이 없다고 포기하기도 애매한 재능. 이런 애매한 가능성을 가지고 목매단 시간이 무려 12년이다. 12년이란 시간 동안 포기하려다 다시 매달리고 도망가 잊고 살려 해도 어느새 불쑥 고개를 드는 그런 재능. 이 애매한 재능에 목매는 삶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먹먹한 감정이 현실로 밀려 올 때마다 나는 가만히 서랍 안을 보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또다시 애매한 재능에 코가 꿰여 다시, 취업 준비생이 되었다. 되고야 말았다. 주변의 가족, 친구, 동기들에겐 다 잊은 척, 꿈 그거 별것 아닌 척하고 살아왔지만 또 '지랄병'이 돋아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역병에 돌고 돌아 1평 남짓한 고시원 방 안에서 이렇게 불합격 이메일을 열어보아야 했다.
지랄병. 엄마는 정기적인 나의 사표를 지랄병이라 했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스스로가 대견하고 빛나는 삶을 사신 엄마에겐 이제껏 실패만을 경험하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식의 방황을 한심해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니가 뭐 대단하다고 유난인지 모르겠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고? 침묵으로 (혹은 가끔 한숨으로) 몇 년 지켜보던 엄마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털어내듯 집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엄마도 몰랐겠지? 한심한 자식이 또 지랄병이 도져 뛰쳐나올 줄은 결혼도 연애도 실패할 줄은, 이 나이에 또다시 취업 준비생이 되어버릴 줄은.. 실패한 자식은 반품되어 다시금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엄마는 받아주지 않았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나는 가만히 서랍 속을 바라보며 숨을 쉬었다. 목소리를 내기보다 주변 눈치만 보던 나. 그렇게 눈치를 볼 거면 끝까지 숨죽이고 살 것이지 한 번씩 지랄병이 도져 뛰쳐나와야 했다. 그리고 또다시 실패. 내 인생은 그런 도돌이표 인생이다. 고시원에 떠밀리듯 들어올 땐 짐이랄 것도 없었다. 옷가지 몇 개와 수저 한 벌, 노트북. 그리고 20년을 함께 해 온 작은 상자. 결혼도 직업도 학교도 실패한 인생엔 이 상자와 함께였다. 창도 없어 쿰쿰한 냄새가 나는 고시원 방에 짐을 풀 때에도 가장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 깊숙이 상자를 밀어 넣었다. 내장이 뒤틀렸다. 세상은 합격 아니면 불합격으로 나뉘어있었다. 나는 언제나 아슬하게 합격의 선을 넘지 못했다. 1점이나 2점 정도의 차이였다. 그 1, 2점이 다시 발목을 붙잡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서랍을 열어 상자 안을 바라봐야 했다. 파리하게 날 선 칼날에 핏줄이 선 눈알을 비추었다.
언제부턴가 서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나를 따라다닌 30센티미터의 식칼. 칼몸과 칼날이 하나로 이어진 탄소강 나이프.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날을 보고 있노라면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쿵쿵 제자리를 찾았다. 숨이 틔었다. 이 칼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소음이 뚝 끊기고 쇠붙이의 서늘함과 갈비뼈 밑에서 뛰는 심장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실패한 인생도, 지랄 난 내 인생도 서랍 저편으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아프게 갈비뼈를 때리며 날뛰고 있었다. 눈앞의 모니터에서 반사되는 불합격의 글자 때문일까? 손을 뻗어 처음으로 그것의 손잡이를 잡아보았다. 차가운 기운이 맞닿은 손에 남았다. 숨을 천천히 내쉬자 심장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그때 갑자기 책상 위에 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흠칫 눈을 돌려 화면에 뜬 글자를 바라봤다. 익숙한 번호 위로 엄마라는 문자가 반짝였다. 손을 뻗어 받으려 했지만, 이상하게 칼이 손에 달라붙어 받을 수 없었다. 전화기는 한동안 떨리다 멈췄다. 조금 안도하던 그 순간 다시 한 번 부르르 진동했다. 이번엔 문자였다.
-입금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제 더 이상 연락은...
미리보기로 뜬 작은 박스에 쓰인 글자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 미리보기 옆 프로필 사진에 활짝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잠시 멈췄던 심장이 또다시 날뛰었다. 눈앞이 점점 붉어졌다. 손에 붙은 쇠붙이에도 전혀 진정할 수 없었다. 숨을 다시 내쉬어 보아도 그대로였다.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완전히 내버려진 것이다. 맥없는 걸음으로 문을 열었다. 몇 걸음 걸었다. 방 밖으로 사라지듯 빠져나왔다. 상자 안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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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다, 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춘 작가의 작품입니다.
본 프로그램은 2024년 부산광역시, 부산문화재단 <부산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돋움]> 사업으로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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