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img src="/icons/book-closed_gray.svg" alt="/icons/book-closed_gray.svg" width="40px" />

나의 나무펜 선생님 (지은이: 김미양 / 장르: 초단편소설)

</aside>

서단이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 온 건 초여름의 어느 밤이었다. 내가 옷장에서 막 여름 이불을 꺼내 펼쳤을 때, ‘카톡’ 알람이 울렸다.

—은솔아 안녕, 잘 지내니?

나는 몇 분간 답장을 망설였다. ‘반갑다, 나야 뭐 잘 지내지’라고 썼다가 지우고, ‘너는 요즘 잘 지내?’라고 썼다가 지웠다.

서단이는 대학 졸업 후 몇 년간을 임용고시에만 매달려온 친구였다. 서단이 정도면 단번에 붙을 수 있을 거라는 대학 동기들의 예상과는 달리, 서단이는 매번 1차에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작년 말 즈음부터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존재감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서단이의 소식을 안다는 친구도, 서단이와 연락하고 지낸다는 친구도 드물었다. 또 한 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로 집에 틀어박혀 두문분출한다더라는 풍문을, 연초 술자리에 가서야 스치듯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서단이와 나는 그리 깊은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전공도 서로 달랐고, 단지 영화동아리에서 만나 조금 알고 지낸 사이랄까. 처음 동아리방에 모여 빔프로젝터로 <뉴욕 아이 러브 유>를 보던 날, ‘영문과면 자막을 안 읽어도 되는 걸까?’ 궁금해서 나는 옆자리의 서단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정작 서단이는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그 뒤로도, 일주일에 한 번 모여 영화를 보는 날마다 서단이는 늘 내 옆에서 숙면을 취했다. 마치 2시간 동안 눈을 붙일 곳이 필요해 영화동아리에 가입한 것 같았다. 서단이는 과수석을 차지할 정도의 학점을 유지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 하는 친구였다. 내가 서단이와 가까워지지 못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는 서단이의 그런 ‘열심’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코를 골면서 자는 서단이를 흔들어 깨우지도 않았고, 영화가 끝난 뒤 딱히 말을 걸지도 않았다.

뭐라고 안부를 물어야 할까.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물음표가 없는 문장을 카톡으로 전송했다.

—오랜만이네. 이제 슬슬 여름인가 봐. 더워지면 잠들기가 쉽지 않겠어.

서단이는 몇 초 만에 답장을 보내왔다. 미리 할 말을 적어두었던 사람처럼. 카톡, 카톡, 카톡. 내가 무어라 다시 답을 하기도 전에 연달아 장문의 메시지가 쌓였다.

—나는 요즘 아주 잘 자. 전에 없이 달콤한 잠이야. 예전 같으면 계절이 빠르게 흘러가는 게 날 초조하게 만들었을 텐데, 요즘은 전혀 그런 게 없거든. 조금 기다리면 언제고 봄은 또 다시 일어설 테니까.

—아, 너 그거 아니? 입춘이라는 한자. ‘들 입(入)’자가 아니라 ‘설 입(立)’자를 쓴다? 겨울을 통과해 봄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겨울 위에 봄이 일어서는 거야.

—내가 요즘 한자 학습지를 하고 있거든. 첫날, 학습지 선생님한테 연필과 연필깎이를 선물 받았어. 문제지를 푸는 거라면 지겨울 정도로 많이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뾰족하게 연필을 깎고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면서 빈칸을 채우다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 볼펜으로 답안을 작성할 때랑은 다른 느낌이었어.

—입춘. 네모 칸 안에 그 한자를 한 획씩 천천히 써 나가는 동안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거야. 봄이 일어선다. 봄이 일어선다. 봄이 일어선다.

—설마 입춘이라는 한자를 내가 그동안 몰랐을까. 우리 엄마도 해마다 현관문에 ‘입춘대길’ 부적을 붙이는데 말이야. 그런데, 연필로 써보니까, 내가 그 단어를 진짜 처음으로 배우는 아이 같은 심정이 되더라고.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해서 무심히 넘겨왔던 단어들을, 이제야 ‘진짜’ 눈을 뜨고 읽게 되었구나 싶었어.

—사실, 내가 작년에 또 시험 떨어지고 나서 너무 힘들었거든. 합격자 발표가 끝나고 나면 세상은 온통 겨울이잖아. 그 겨울이 너무 막막했어. 나 혼자만 겨울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3월이 되어도 4월이 되어도 내내 춥기만 하더라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용기는커녕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무서웠어. 그러다 지난달에 한자 학습지를 신청하게 된 거야. 아주 작은 것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서. 그거라면 부담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입춘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새롭게 배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은솔아, 나는 이제 춥지 않아. 세상이 아무리 겨울이어도, 내 발밑에 봄이 있으니까. 너도 여름밤이 너무 더우면 이렇게 생각을 바꿔 봐. 지금 네 발밑에 가을이 있다고.

서단이의 카톡을 모두 읽고 나니, 답장을 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래, 앞으론 다 잘 될 거야’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한참을 망설이다, 금색 은색 수술을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튜브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짧게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