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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티와 블루 사파이어 ****(지은이: 모아 / 장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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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늘 걸어 다니며 출퇴근하던 길을 조금 더 걸어서 익숙한 작은 칵테일바에 들어갔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어떤 금요일에 술 한잔이 간절히 필요해서 눈에 보이는 아무 가게나 들어왔던 것이 지금의 습관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인테리어와 같은 바텐더들. 몇 번이고도 들여다본 메뉴판을 괜히 뒤적거리다 늘 마시던 롱티를 주문했다. 다른 것 좀 마셔보라고 하지만 여전히 이게 좋았다. 이런저런 술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롱티는 내 일상 같았고, 함께 섞여 있는 콜라의 시원한 탄산이 답답한 마음을 뚫어주는 것 같았다.
칵테일을 내오던 바텐더가 휴가 계획을 세웠는지 물었다. 나는 그냥 너무 바쁘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프레첼을 와드득 와드득 씹었다. 벌써 여름이구나. 창밖 너머로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이 동네는 여름이 되면 휴가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늘 반복되는 일상 지루한 이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샘이 났다.
딸랑딸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서 빨대로 얼음을 빙빙 돌렸다. 왁자지껄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들, 자리에 앉으면서도 신난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사람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살펴본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맛의 칵테일을 마시지만, 바뀌는 건 유행에 맞춰진 배경음악과 옆에 앉는 손님들뿐이니까. 빨대로 롱티를 들이키며 손님 구경을 해본다. 자리가 하나둘 찰 때마다 들리는 새로운 말투와 언어. 그리고 모두 다른 칵테일들.
옆자리에서 나에게 같이 먹자며 나초를 내밀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가진 A는 묻기도 전에 자신은 어디에서 왔는지, 여기에 휴가로 며칠을 보낼 건지 술술 말했다. 그 이야기에 적당히 대답하며 잔에 담긴 얼음을 휘젓고 있을 때 A가 물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냐고.
“저는 여기에서 살아요.”
A는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이렇게 예쁜 바다가 가까이에 있고, 이런 작고 분위기 좋은 술집들이 많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 동네에 살고 있다니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 의견에 다 동의할 수 없었기에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거리들이 쌓여있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여유로웠을까. 그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걸 눈치챘는지 목에 걸고 있던 사진기를 들이밀며 오늘 자신이 담은 동네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사진 속에는 익숙한 거리가 보였다. 그런데 사진 속의 익숙한 거리와 동네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꽤 묵직해 보이고 근엄해 보이는 대문 앞에 걸린 귀여운 명패, 테라스에 누워 햇살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는 노부부, 가족을 배웅하는 뒷모습, 아이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모래성, 한 카페 앞에 여유롭게 누워있는 고양이, 갈매기를 닮은 마스코트 동상 주변에 모여 앉은 갈매기들. 뜨거운 햇살 아래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주인 옆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도베르만.
열심히 설명하는 A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담은 시선을 따라갔다. 나에게는 늘 바쁘고, 정신없는 동네에서 사소하지만 따뜻한 웃음을 짓게 하는 것들을 찾아내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A는 앞에 놓인 맥주잔을 비우더니 자신과 같은 것을 마셔보지 않겠냐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A는 블루 사파이어 두 잔을 주문했다.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던 칵테일이었다. 투박한 하이볼 글라스에 담겨있는 롱티와 다르게 시원하게 생긴 허리케인 글라스에 담겨 나왔다. 진갈색의 롱티와 다르게 밝고 푸른 칵테일이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을 들어 보이는 그를 따라서 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고도 달달한 맛. 그렇게 A가 건네는 추억이 섞인 술을 얻어 마셨다.
우리는 점점 북적이는 가게에서 나와 동네를 걸어보기로 했다. 가까이에 있는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밤이 되어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산책하는 강아지들, 가볍게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처럼 술기운을 바닷바람에 날려 보내려는 사람들. 사람들을 따라서 우리도 걷기 시작했다. A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가장 맛있는 가게는 어디인지, 언제부터 그 칵테일바를 자주 갔는지, 왜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지, 이 동네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렇게 걷다 보니 바닷가가 끝나고 언덕길에 이르렀다.
“A, 여기 올라가면 달이 잘 보인다고 하던데 올라가 볼래요?”
바닷가와 달리 조용한 언덕길을 올랐다. 늦은 밤이어서인지 언덕길의 집도 가게도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타박타박 걷는 우리의 발소리만 울렸다. 공기마저 차분한 이 길에서 일정하게 들리는 발소리가 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언덕길에 보이는 집 창문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푸른 하늘빛이 가득한 창문, 아늑한 주황 불빛에 책이 가득 쌓인 창문, 아직도 크리스마스 전등을 붙여놓은 창문.
어느새 나무들 사이로 익숙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저 멀리 언덕 아래에 있던 바다가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파도와 파도를 감싸고 있는 바다, 그 바다를 감싸고 있는 건물들의 불빛. 파도 소리를 타고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바다가 철썩이면서 내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잠깐 멈춘 기분이었다.
“이 동네 진짜 멋지다고 했죠?”
A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땅만 보고 걸어서, 정신이 없어서, 여기저기 달려오는 차들을 피하느라, 걱정거리들을 가득 안고 다녀서 보지 못한 동네의 모습을 이제야 발견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뺨을 지나는 바람과 아늑히 들리는 파도 소리. 어쩌다 얻어 마신 술 덕분에 발견한 이 장면을 문득문득 꺼내 보며 살아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