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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크드 알래스카 (지은이: 김미양 / 장르: 초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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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가체프 향기를 맡을 땐 꼭 군고구마 봉지를 품에 안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가 내린 커피 한 잔을 두 손에 쥐고 나른한 미소를 짓던 K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녀는 접시에 놓인 오페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커피의 향에 취해 있었다. 오페라는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 하얀 접시 위에 서 있는 네모반듯한 오페라 조각은 허허벌판 위에 홀로 세워진 건물 한 채 같았다. 에스프레소에 적신 비스퀴가 한 층, 달콤 쌉싸름한 가나슈가 한 층, 진한 풍미의 버터크림이 또 한 층… 저마다 다른 빛깔의 갈색 층이 켜켜이 반복해서 쌓여 만들어진 오페라의 가장 꼭대기 층에선 초콜릿 글라사주가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금박 한 조각이 살포시 올라가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G타워가 그러하듯이. “혹시 다음에 알래스카 남으면 갖다줘.” “남기는. 이것도 겨우 가져온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커피잔에 시선을 박은 채로 답했다. 베이크드 알래스카는……, 이라고 그때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린 듯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는 G타워 지하 3층에서 근무하는 파티시에였다. 이탈리안 머랭을 만들기 위해 파도 거품처럼 요동치는 달걀흰자 위에 뜨거운 설탕 시럽을 천천히 부을 때 그녀의 눈빛은 매서웠다. 짤주머니를 쥔 오른손을 일정한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머랭을 짜놓는 손놀림 또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하얀 크림 같은 머랭은 규칙적인 물결무늬를 만들어내면서 돔 형태의 아이스크림 표면을 감쌌다. 토치의 뜨거운 불꽃이 닿으면 머랭은 연갈색으로 그을렸다. 그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겉면만을 갈색으로 구워내는 디저트. 베이크드 알래스카(Baked Alaska)는 그녀의 장기 중 하나였다. 단체 주문이 있는 날이면 그녀는 서른여 개의 디저트도 동시에 재빨리 만들어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접시들은 하나같이 완벽했다.
“어쨌든 이제 커피는 줄이려고.” 한참 만에 그녀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며 말했다. 커피잔에는 커피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커피잔에서 손을 떼어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공짜 커피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두 볼이 조금 발그레해진 것도 같았다. 어쨌든 그날의 그녀 모습은 확실히 주방에 서 있을 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임신 후에도 일을 쉬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지하 19층이었으니까, 새로 태어날 아이를 데리고 한 층이라도 더 높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지하 4층의 카페에는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온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 돈을 모으기 위해서 잠을 줄이는 것이 불가피한 사람들. 잠을 줄여 일을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좀 더 돈을 모으기 위해 좀 더 잠을 줄이고 좀 더 일을 하려고 버둥거리는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커피를 사고, 잠을 쫓아내고, 또다시 일터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정말로 돈을 모아서 지상으로 이사를 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나는 그 후로 가끔 그녀가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나 밀푀유를 한 조각 들이밀면서 “커피 좀 내려 줘”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씩씩하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예전과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1년쯤 뒤,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은 나의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커피 한 잔 부탁해.” 그녀는 주문하고서 쓰러지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감싸고 하아, 숨을 내쉬었다. “너무 피곤해. 계속 잠을 못 자고 있어.”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들이마셨다. 출산 전후로 잠깐의 휴직이 있었지만, 곧 복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VIP의 예약이 밀려드는 시즌이라 근무시간도 연장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수십 수백 접시의 디저트를 거뜬하게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문제는 아이였다. 출근할 때 영유아보호소에 맡겼다가 퇴근할 때 다시 아이를 안고 집에 돌아가면 그 이후로 그녀의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마저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했다. 베이킹파우더의 무게를 1g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량하고, 오븐의 윗불 아랫불 온도를 민감하게 조정하고, 접시에 앙글레즈 소스를 끼얹을 땐 한 방울도 허투루 흘리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실수투성이 엄마’는 그녀의 허용범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마다 정확한 양을 계량해 분유를 타 먹이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일을 좀 줄여달라고 요청하지 그래, 하고 어쭙잖은 조언을 해보려 했지만 곧 그녀가 밝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여는 바람에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위에서 포상이 내려올 거래. 그러면 집도 지금보다 높은 곳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근무시간을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어쩌면 우리 사은이가 스무 살 되기 전에 지상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커피 한 잔을 빠르게 비운 K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얼마지?” “…… 3만 루니.” “……?”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난 1년간 커피 원둣값이 미칠 듯이 상승해 버린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원두 물량을 통제하고 있어. 미안해. 이번 한 번은 서비스로 줄게. 하지만 앞으로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 그녀는 1년 전의 커피 가격인 5천 루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1년 만에 찾아왔던 그날 이후로도 원두 가격은 계속해서 올랐다. 3만 루니였던 커피값은 한 달 새에 3만 5천 루니가 되었고, 한 계절이 지나자 8만 루니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가 찾아왔다.
“커피 한 잔 부탁해. 오늘은 제대로 돈 낼게.”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두 뺨이 수척했다. 그녀는 근무시간을 더 늘렸다고 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선택이었다. VIP 예약이 잡힌 날이면 그 앞의 사흘부터 그녀는 철야 작업을 해야만 했다. VIP들이 더 정교한, 더 섬세한, 더 화려한 디저트를 원하는 까닭이었다. 하루에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딱 세 시간뿐이었고, 그 시간은 그녀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은이를 볼 수 있는 게 그 시간뿐인데, 엄마인 내가 잠을 잘 수는 없잖아.” 나는 묵묵히 평소보다 더 진하게 내린 커피를 건넸다.
그녀의 하루 일당은 5만 루니였다. 초과수당을 다 더한다 해도 7~8만 루니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일을 하기 위해 잠을 줄였고, 일을 해서 받은 돈은 고스란히 잠을 깨우는 데 들어갔다. 그녀는 시간으로 돈을 사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와 함께 지상으로 가기 위해서.
하지만 아이가 자라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물가는 올라갔다. 커피 한 잔 값은 어느새 30만 루니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저녁, 커피를 주문하는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 흐릿했다. 그녀는 가방을 뒤져 지폐와 동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구겨진 지폐를 꺼내는 그녀의 손이 달달 떨렸다. 테이블 위에 모인 돈은 13만 루니였다. “한 시간…… 한 시간 있다가 다시 출근해야 하는데…… 사은이를 못 본 지가 오래돼서……”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얼마간 망설이다가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곳’에 대해 알려주었다. 벽을 가만히 응시한 채로. “…… 카페인 주사를 놔주는 곳이 있대. 지하 24층으로 가서 초록색 문을 찾아.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5만 루니 정도면 하루치 카페인 주사는 맞을 수 있을 거야.”
그때,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리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녀에게 절대로 ‘그곳’에 대해 알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린 순간 마주한 그녀의 눈빛을,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듯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카페인 주사에 중독된 이들이 아슬아슬하게 몇 년을 버티다 일터에서 퇴출당하는 건 G타워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쫓겨나지 않았다. 아이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근무를 계속했다. 그리고 아이의 생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하얀 유니폼을 입고 손끝을 파르르 떨면서, 여전히 완벽하게, 여전히 아름다운 베이크드 알래스카 위에 금박을 올리다가 쓰러져 그대로 영영 깨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