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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네모난 레몬 베개 (지은이: 김미양 / 장르: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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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버스 의자에 앉아 있다. 마을버스는 울퉁불퉁한 도로를 통과하느라 불규칙적으로 덜컹거리고 A의 머리도 그에 맞춰 흔들거린다. A는 가방 속을 뒤적거려 새콤달콤 하나를 꺼낸다. 얇은 종이 껍질을 벗겨 노란 벽돌 같은 알맹이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는다. 새콤한 레몬 맛이 입안에 번진다.

A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에는 진한 어둠이 칠해져 있다. 멀리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아파트에 노랗고 하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저 하늘에 비하면 분명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별이지만 이 버스는 그곳에 닿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저곳에 작은 별 하나 가져볼 수 있을까. 자기 이름으로 된 온전한 별 하나를. A는 무의식적으로 유리창 밖 별 하나를 향해 손을 뻗다가, 이내 체념한 듯 그 손을 가방 속으로 처박는다. 새콤달콤 하나를 다시 입에 넣었다. 싸구려 인공 향. 레몬이 아닌 걸 알면서도 언제나 침이 고이고 마는, 새콤한 맛. 열린 지퍼 사이로 문제지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벌써 28살. 시험은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시험에 떨어진다면, 그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A는 손끝으로 새콤달콤 껍데기를 꾸깃꾸깃 접는다.


한때, 내 앞에 펼쳐진 악보는 분명 더 넓고 깊은 세상을 노래하고 있었어. 까만 음표들은 칠석날 하늘을 메우는 까치들처럼 일제히 머리를 맞대고 날개를 파닥거렸지. 내 열 손가락은 그 검은 머리를 하나씩 짚으며 다리를 건너려 하고.

알고 싶었어. 나에게 주어진 네모난 종이 건반 바깥엔 무엇이 있을지. 솔 다음엔 라, 라 다음엔 시,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 바깥세상에선 어떤 음이 울려 퍼지는지. 하지만 나의 오른손은 끝내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지. 작은 까치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내게 주어진 종이 건반은 그 까치의 좌표를 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무의 날갯짓만이 허공을 떠돌아. 꿈은 그렇게 차곡차곡 접혀가. 자신이 짚을 수 있는 날개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네모반듯하게.

연두색 마을버스가 동산을 돌고 돌아 어둠을 통과할 때, 울렁거리는 멀미를 잦아들게 하는 나의 작고 네모난 레몬 베개.

엄마가 오지 않는 밤, 내가 오려 만든 종이 인형은 노란 드레스를 어깨에 착 접어 걸고서 노란 베개에 누워 잠이 들고, 난 그 옆에 나란히 누워 노란 베개 하나를 입에 물고서 노란 상상에 빠져들었지. 난 엄지공주처럼 작아질 거야. 난 레이스가 달린 노란 드레스를 입고 노랗게 반짝이는 궁전으로 가 폭신한 침대에 누워 새콤달콤한 베개를 베고 잠이 들 거야.

어둠을 베고 잠에 드는 날에도 입안 가득 고이는 레몬 향. 네모가 입안에서 녹진해질 때 나는 종이 건반을 두드렸네. 레몬 빛 꿈을 꾸었네.

창밖엔 진한 어둠이 칠해지고, 아파트 표면에 촘촘히 박힌 노랗고 하얀 불빛들. 오선지가 빽빽이 들어선 악보와 같이 도시의 야경은 줄지어 반짝임을 노래하네. 멀리서 파닥이는 수많은 별들. 까치가 날아간 저 먼 먼 하늘에 비하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땅 위의 별들.

마을버스는 돌고 돌아 어둠을 통과하지만, 나는 알아 노란빛 사탕 알알이 가득한 저 달콤한 별들의 나라로는 날 절대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걸.

도, 레, 미, 세 번째 손가락 다음엔 다시 엄지손가락을 움직여서 파, 내게 주어진 네모난 종이 건반 안에서 지겹도록 반복하던 1 옥타브짜리 하농처럼 버스는 돌고 돌아 같은 자리만 반복하지. 나의 젊음도 돌고 돌아 여전히 제자리. 저기 반짝이는 세상에 가고 싶어도 나의 인생은 그저 멀미 나도록 돌고 돌아야만 해.

어둠을 베고 잠에 드는 날에도 나는 종이 건반을 두드렸네.

레몬 빛 꿈을 꾸었네.